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이핑-톈진 전투 (문단 편집) === 베이핑 함락 === 결국 쑹저위안은 7월 26일의 최후통첩을 수령한 이후, 일본을 유화책으로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7월 27일 베이핑 성방사령부를 설치하고 장유번을 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방어부대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7일 저녁에 과정원을 바오딩으로 보내 쑨렌쭝, 만푸린 등의 부대를 북상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일본군은 화북 공략을 위한 병력 배치를 마무리한 상태였다. 7월 27일 오전 3시, 일본군은 자신들이 내건 최후통첩을 무시하고 베이핑 동쪽 20킬로미터 지점의 통주의 중국군을 공격하고 다시 5시에 항공기 18대와 기병대를 동원하여 베이핑 남쪽 단하를 공격하였고 중국군은 1천명의 사상자를 냈다. 7월 27일 오후, 고려영, 창평, 탄산, 사하의 중국군 기지가 일본군의 일제 공격을 받았다. 7월 28일 오전 8시, 베이핑 남쪽에 위치한 남원의 29군 사령부가 일본군 항공기 40대의 공습을 받았으며 조선군 20사단 소속 3천명의 일본군 기계화 보병부대가 맹습하였다. 중국군 기지는 모두 파괴되었고 29군 부군장 동린간, 132사단장 조등우 등 여러 고급장교와 장병들이 전사했다. 이어 관도군 독립보병 1여단과 혼성 11여단이 서원을 공격했다. 북원에도 일본군의 공격이 이어졌으며 텐진의 외항인 탕구에 위치한 다구 포대도 일본 해군과 관동군 야전중포병 7연대의 공격으로 무력화되었다. 5사단, 6사단, 10사단 소속 3만명의 일본군이 3면에서 베이핑을 포위하자 쑹저위안은 28일 오후에 베이핑 성내에서 [[친더춘]]과 장자충을 호출하여 긴급회의를 소집하였다. 결국 베이핑의 명사들이 일본군의 포화에 베이핑의 문화유산이 파괴될 것을 우려하였으며 중과부적임이 명백했으므로 긴급회의는 베이핑 포기를 결정했다. 베이핑에는 장자충이 기찰정무위원회 대리위원장 겸 베이핑 대리시장을 맡아 머물기로 하고 9시에 쑹저위안과 친더춘이 잔여 병력을 인솔하여 바오딩으로 퇴각했다. 7월 30일, 일본군이 베이핑을 함락시켰고 중앙육군학교 베이핑 분회 소속 생도와 교관들은 일본군에 맞서 최후까지 저항하다 대부분 전사했다. 황하 북쪽 기슭에 범선을 타고 지나가던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갑자기 전쟁이 우리에게 닥쳐왔다. 우리가 밤에 머무를 숙소를 찾으려 했던 작은 마을은 군인과 민간인, 수레, 노새, 말, 노점상으로 가득했다. 마을을 향하는 흙길을 걸어 올라가자 부상당한 병사들이 길 양쪽으로 줄지어 쓰러져 있었다. 더럽고 피묻은 붕대를 감은 사람이 수백명이었고, 그중에는 의식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 그들 곁에는 의사도, 간호사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